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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동학속으로] (9) 전주성
[걸어서 동학속으로] (9) 전주성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4.08.05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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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 시즌 4
전동성당
전동성당

  아르마리(Armary) 앓음을 알아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본래 하나로 각자 제 궤도를 이탈치 않고

 공존하며 천지인 삼합정신으로 소도 지구촌 지키며 살았다.

 현세는 자타가 선악 분별심만으로 성선과 선악을 구별하고

 사람은 대립과 갈등과 번민으로 혼돈의 시대만을 반복했다.

 

 우주 밖에서 우주를 연구했던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 어디에도 창조신이 숨을 곳은 없다고 말했다.

 우주 밖에 절대자가 따로 있음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은

 자체가 유일신으로 하늘과 땅 사람이 한울에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지성력은 단군신화로부터 제시되며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눈을 뜨며 신단수 아래 소도 만들었다.

 신시 소도(蘇塗)에서 곰족호족은 사람 되려 스무하루 동안

 쑥 마늘로 동화되며 웅녀 환웅 사이에 단군왕검 태어났다.

 

 지식으로 피차를 구별하는 중매자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어

 본래 둘이 아닌 생명 말씀으로 소피아 신과 직거래를 했다.

 재단 제기물을 보관하는 신성한 벽장이 아르마 아르마리로

 천지인(天地人)이 본시 하나임을 깨달아 아르마 앓음이다.

 

 소피아로 피차가 없는 하나의 아르마는 생명의 빛이 되었고

 배달겨레는 조화 교화 치화로서 스스로 천손임을 선언했다.

 인내천(人乃天)에 의한 이화세계 홍익인간의 천지인 삼합은

 天자유 地평등 人평화로 역사를 경영하며 지성력을 키웠다.

 /백승기 박사

  

 ▲ 동학혁명군 전라감영에 입성하다.<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1894년 3월말, 동학 농민군은 1만의 병력으로 전라감영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전공을 세워 실정을 만회하고자 감영군과 보부상, 향병들을 모아 2,200여 명의 토벌대를 출정시켰다. 농민군은 금구 원평까지 진출하였다가 감영군의 출동 소식을 듣고 부안을 거쳐 백산으로 후퇴했다. 혁명군은 전투에 패한 척 계속 후퇴하면서 황토현으로 유인하고 새벽에 기습하여 감영군을 대파하였다. 농민군은 바로 전주성으로 가지 않고 남하하여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 관아를 점령하고 폐정을 정리하며 민심을 수습하였다. 수만의 농민이 합세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했다.

  한편,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최신 수입 무기로 무장 한 경군과 감영군을 이끌고 농민군을 추격하였다.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으로 경군을 유인하여 격파시켰다. 이후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전주성에 다다랐다. 서문 밖 용머리 고개에 진주한 농민군은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는 전주성에 접근하여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서문 밖과 남문 밖에 군중들과 섞여 있다가 일제히 포와 총을 쏘자 놀란 군중들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갔다. 결국 5월31일(음력 4월27일) 동학군은 큰 저항 없이 전주성을 무혈입성하고 전라감영을 접수한다.

 

선화당서 설명
선화당서 설명

▲집강소(執綱所), 지방자치제 실행의 벼리를 잡다. <안중근 장군 전주기념관 관장 고혜선>   1894년 7월 6일(음)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 관민상화(官民相和), 관과 민이 함께 국난을 극복하자는 약속에 합의하고, 전라감사 김학진은 동학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나주, 남원, 운봉에서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 전역에 52개 집강소가 설치되어 대대적인 개혁을 실행해 나간다.

  집강소는 집강과 서기, 성찰과 동몽, 호위군으로 구성되었다. 개혁 행정을 시행하고 소장(訴狀)을 처리하는 등 대민 사업은 집강이, 문서 작성 정리 및 서류 검열은 서기가, 치안과 경비, 감찰은 성찰이, 전령과 연락은 동몽이 담당하였다. 각 집강소의 집강들은, 탐욕스러운 벼슬아치와 썩어빠진 관리들, 욕심 많고 포악한 부호들을 색출하여 징계하고, 지주들의 소작료를 압수하는 등 정치와 경제 문제를 개혁해 나갔다. 그리고 양인과 천민의 신분 차별을 없애고,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는 등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에 섞여 들어온 온갖 잡인들로부터 무리한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학군들 역시 다양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1894년 7월, 8월, 한반도에는 농민이 참정의 주체가 되어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실행되는, 민주 사회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주동학명기념관 설명
전주동학명기념관 설명

▲다급해진 조선조정의 실정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으로 시작되어 1894년 4월 무장의 봉기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은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5월 31일(음력 4. 27)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했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장위영의 800여명의 군사를 내어주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 지휘하의 중앙군을 파견, 6월 1일(음력 4, 28) 전주 교외에 도착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주성을 공격했고, 수일간의 공방전 끝에 쌍방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한편으로 조선조정은 중앙군만으로 동학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 6월 3일(음력 4, 30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청군이 6월 8일(음력 5, 5) 아산만에 상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으로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 하던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톈진 조약에 의거, 6월 9일(음력 5. 6)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병력을 진주시킨다.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위하여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과 달리 다른 목적이 있던 일본군은 한양과 가까운 제물포에 상륙한다.

자국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들어오자 청과 일본의 군사주둔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선조정과 동학 농민군은 6월 11일(음력 5월 8일) 전주화약이 성립하고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역사는 청일전쟁, 을미사변, 2차 동학농민전쟁, 러일전쟁,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마지막으로 조선을 이어왔던 대한제국은 식민통치의 길을 걷는다.

조선조정이 동학농민혁명의 내부 문제를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 자강의 원칙에 조금 더 무게를 두었다면 대한제국의 역사가 한페이지, 한줄이라도 더 기록되었을까? 아니면 당시 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일본에 더 빨리 무너졌을까?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 보고, 반복되는 악순환을 경계해야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전주동학혁명기념관

▲전주화약으로 배우는 교훈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홍계훈과 민영준(후에 민영휘로 개명)의 주장대로 청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그러자 조선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에서도 재빨리 군대를 들여보내게 되는데 청과 일본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일까봐 홍계훈은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전주화약이 체결되었고 1차 동학농민봉기가 막을 내리게 된다.

전봉준과 지도부가 작성한 27개조 개혁안 중 14개조 개혁안이 ‘전봉준 공초’에 전해진다. 대부분 탐관오리의 횡포를 금지하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료의 부정에 항거하는 농민군을 외세를 끌어들여 진압하고자 했던 조선의 정부와 관료들은 이후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전봉준 동상 앞에서

▲ 사람이 하늘인 새로운 국가를 디자인하자<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1592년 7월 완주군 이치와 웅치에서는 민족의 불을 끄러온 일본군과 맞서 결사 항전을 하던 황진장군, 황박장군이 계셨기에 전주성을 지켜냈다.

 300년이 흐른 1894년 5월 백성과 동학군에 의해 스스로 성문을 열어 보인 전주성!

 동북아 강국과 서구 열강의 각축전이 되어버린 조선의 강토.

 민족혼과 국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은 동학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때는 역부족이었다.

 21세기 이제 국제화 시대다. 세계가 생명공학에 의한 사람중심 문화를 추구해올 것이다. 우리는 국민이 국가라는 고유한 국가관을 정립하여 OECD 선진국으로서 도덕 국가 위상을 높이자.

 그리고 사람이 하늘인 새로운 국가를 디자인하자. 

 

전주 덕진공원의 김개남 추모비
전주 덕진공원의 김개남 추모비

 ▲전주성에 민족자존을 세우자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우리 영토에는 언제나 우리 민족이 살았고 자립 자존 하는 주권자로 위기마다 스스로 국가가 되어 역사를 경영하였다.

 민족 역동기에는 의병 승병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서원의 깃발을 들고 죽창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저력을 발휘했다.

 불 끄러 온 자들에게 동조한 동족에 의해 조선의 불은 자주 꺼졌다.

 전주성에 민족자존을 세우는 K-한류 J-한류의 빛으로 역사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한복, 한식, 한옥, 한글로 솜씨 내고 맵시 내어 꾸미는 차별화 전북이 되어야 한다.

 우선하여 전라도 밥상부터 복원이 필요하다.

 내 몸에 맞는 맞춤형 식단 찾아‘밥 한번 먹으러 전북’에 와야 한다.

 내 몸을 약탕기로 만드는 밸런스푸드는 과학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으로 먹는데 인심 난다고 한다.

 전북의 차별화 많이 늦었다. 그렇다고 그리 서둘지도 말자,

 알고는 있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자문위원
자문위원

▲자문위원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김길태 솔라리움 대표

△권오석 CTG한국 대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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