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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동학속으로] (8)정읍 황토현
[걸어서 동학속으로] (8)정읍 황토현
  • 정읍=강효 기자
  • 승인 2024.07.22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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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최대 승전지 혁명 바람 전국으로 불다

    녹두꽃 파랑새 혼(魂)불이여

 

 녹두장군 파랑새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 떨어지는 날엔
 개남(開南)장군 우는 황토현에 5대 장군 혼불 놀이 펼친다.
 작은 열매 작은 새들로 백성 꿈 영글어 날개짓하는 녹두밭
 청포 장수 막지 못한 백성의 질긴 생명력으로 파랑새 되자

 나도 집도 고을도 나라도 지구도 내가 지킨다는 파랑새들
 바닷길 일러주는 연화 등대 구원 방주 남쪽 길 열어냈다.
 칠산바다 수성당 할미 여덟 딸 팔도에 시집가는 바닷길에
 계화(界火) 등대 혼불로 얼씨 절씨 묻어 움트기 발원했다.

 
 내 몸에 맞는 선선 선식으로 내 몸 약탕기 만들어 내듯이
 하나뿐인 나를 얼마나 알고 있나 긴급점검 필요한 시대다.
 복지 나라 열망하며 미래세대 주도하는 복지국가 지킴이들
 나라가 정쟁 대상이 아닌 생명 존중의 율도국을 열어가자.

 
 우주 은하도 태양계 지구도 이미 새로운 괘도로 진입했고
 지구 우주선 지구 우주인들도 새로운 역사경영 시작했다.
 꿈을 가지고 나온 자들이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경영하듯
 서원의 깃발 들어 서당(誓幢) 화상 손도장 수인 찍어보자.

 
 세계 청소년 정신문화 성지 절실한 황토현 동학 혼불터에
 타고난 특성과 지성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요람을 내보자.
 제폭구민 보국안민 성지 조성하고 인내천 천지인 삼합으로
 꺼져가는 민족 불씨 살려 죽백(竹白) 한 울타리 구축하자.

  /백승기 박사

 

▲황토현 전투 후 동학농민군의 향방이 바뀌다.<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전봉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맞서 1894년 1월 고부민란을 주도한 사람이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어 간 동학농민운동의 주역이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 중 가장 큰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를 이끌었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는 관군을 상대로 거둔 큰 승리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조직적이고 강력한 군사력과 전투력을 지녔음을 입증한 사건이 된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고, 농민군의 세력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관군에게는 뼈아픈 충격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의 자치적인 집강소를 설치하며 개혁 추진의 기회를 얻게 된 전봉준은 관군이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자 큰 실망을 하게 된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를 주도하는 전봉준의 태도는 관리의 횡포와 부정부패 척결에서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는 혁명적 성향으로 변화되며 점점 격렬해진다.

이에 고종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 위해 청군의 차병을 요청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동아시아적인 문제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고, 이후 발발한 청일전쟁은 향후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쥐어주는 계기가 된다.

 전봉준은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였으며, 그의 리더십과 헌신적인 투쟁은 고부봉기, 황토현 전투,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우금치 전투 등에서 발한 빛은 나라와 민생을 염려하는 우리들 마음속에 계속 전해지고 있다.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불멸의 바람길'  동상

▲김개남·김덕명·손화중·최경선의 활약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무장기포 후 백산성으로 이동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라감사는 1,300여 명의 관군을 꾸렸다. 최경선은 별동대를 이끌고 백산성 상류 오리쯤인 화호나루에서 관군과 첫교전을 하였다. 패하는 듯 후퇴하여 관군을 황토현까지 유인하였다. 황토현의 좌우 구릉에 좌군은 김개남 부대가 우군은 손화중 부대가 중앙은 전봉준과 김덕명의 부대가 자리했다. 다음날 새벽 농민군은 포를 쏘며 기습하여 관군을 대파했다.

김개남은 태인 대접주로 무장기포부터 혁명에 합류하였다. 휘하에 지리산 포수부대, 재인부대 등 용감한 천민부대가 있어 무력이 막강했다.

손화중은 무장 대접주로 무장기포 이래 단일부대로 최대의 병력인 3,500여 명을 동원했다. 고매한 인품과 새로운 세상의 개벽을 외치는 그에게 선운산 마애불의 비기 소문까지 돌아 무장, 고창, 고부 인근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김덕명은 금구 대접주로 고부기포부터 전봉준의 가장 든든한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다. 금구 원평 금산 일대의 농민 2,000여 명을 꾸리고 중군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최경선은 농민군의 영솔장으로 고부기포부터 전투의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했다. 전봉준 장군의 직할대이며 별동대를 지휘하는 선봉장이다.

집강소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불멸-바람길’ <고혜선, 안중근 장군 전주기념관 관장>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의 주요 전시물 ‘죽창결의’, ‘사발통문 광장’, ‘기억의 들판’, ‘울림의 기둥’, ‘농민의 벽’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그 뜨거운 한 해의 시작과 끝을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탐관오리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외세의 침탈에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던 시절,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케 하고, 반상과 귀천의 차별을 깨부수어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분연히 일어섰던 1894년 조선의 농민들. 고부, 무장, 백산에서 죽창을 들고 일어나 어둠을 깨치고 새 세상을 맞은 황토현의 새 아침. 전국 90여 곳의 농민군이 가슴을 울리고 지축을 흔들며 우뚝 일어섰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 꺾이고 말았던 죽창의 피울음이 엄숙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 불멸-바람길’은 그냥 그 자체로 숨이 턱 막히는 장관이다. 녹두장군을 필두로, 1차 봉기, 2차 봉기 600여 조형물 하나하나가 시대를 넘어 우리의 가슴으로 걸어 들어오는 숨 막힘이다. ‘불멸-바람길’의 동학농민군은 지금도 이렇게 살아, 우리의 삶을 직시하게 한다.

기획취재팀 기념촬영

  ▲황토현 기념공원 건립 지원한 전두환 정권의 의도<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부터의 혁명인 5·16 군사 쿠데타의 박정희와 12·12 군사반란의 전두환이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정희는 부정부패로 썩어빠진 기존 정치를 뒤엎는 군부의 쿠데타가 동학농민혁명과 결이 같다고 웅변했다. 1963년 10월에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관군을 대파한 황토현의 전적지에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웠다. 

   전두환 정권은 3김의 정치적 경쟁 관계를 오도하여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혼란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정당화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사회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해 권력을 탈취하여 제5공화국을 열었다. 분명 불법적인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이다. 그런 군사 독재정권이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1981년 황토현 전적지를 사적 제295호로 지정하였고 1983년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확인되지 않은 일설에 의하면 전두환의 선조가 동학혁명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다가 일본군과 관군에 쫓겨 백두대간을 넘어 합천의 두메산골로 피신하였다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부안 고창 등 전북 어디엔가 있을 조상의 무덤을 은밀히 찾았었다고 한다. 

▲ 사관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인간은 각자 살아남기 바쁘고 잘살기 위해 허리띠를 동여매기만 급급했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우리 민족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며 나인가?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역사 현장 황토현을 바라보았다.

 그릇된 역사관인 ‘사대주의의 노예인가? 식민사관의 노비인가?’

 언제까지 우리는‘사노 식비’로 살 것인가?

 황토현은 교육의 혁신과 정치문화 혁신을 실현하는 실천 교육의 가치로서 습안교육을 실현하고 정립하는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릇된 물질 자본 만능주의로부터 자존감을 되찾고 새로운 정신문화와 인성교육의 문화공원으로서 중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권수정 용인 산양초등 학생이 위패에 제향하고 있다.

▲황토현에 다녀와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동학 혁명농민군 ‘전사들’이여!

 민란에서 혁명으로 그리고 외세와 전쟁을 벌인 민족사의 위대한 절규를 고스란히 간직한 황토현에 다녀 왔다.

 불꽃처럼 산화한 임들의 발자취를 가슴 졸이며 따라가 보았다.

 지난 세기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 중 치욕의 문화 공백기이며 역사 치매와 역사 왜곡의 자들에게 유린된 환란기 였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혁명사는 왕건의 고려건국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미완의 혁명가 정여립 그리고 허균의 홍길동전으로. 수운 최제우의 동학 그리고 3.1운동

죽창결의 전시물에사 기념촬영하는 기획취재팀

 전북은 우리나라 혁명사의 큰 맥으로 이어온다.

 3.1운동을 주도한 동학 3대교주 손병희와 천도교는 증산의 보천교와 더불어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호남의 역사다.

 백성들이 오롯이 구국으로 의병되고 승병되어 나라 대신에 나라를 지킨 호남은 그냥 호남이었다.

 자손만대에 호남의 정신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했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강효 기자(제2사회부/정읍)

▲자문위원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김영재 한국식품클러스터진흥원 이사장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정읍=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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