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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동학속으로] (1)동학의 발생
[걸어서 동학속으로] (1)동학의 발생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4.04.1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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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이 본래 하나!

사람 중심 문화 알아야 한다.
 

하늘은 온 누리를 감싸 안은 집·마을· 나라의 지붕으로
오만가지 만물을 어울리게 하는 조화(造化)로운 울타리다.
지구는 바로 만물이 제 삶을 누려야 하는 생명의 무대이고
땅은 교실로 삶의 방법을 가르치는 교화(敎化)의 현장이다.

사람과 사람은 지구촌에 함께 살아야 할 인생 동반자로서
땅 위에 서로 공생 공존하며 치화(治化)해야 할 대상이다.
하늘의 조화로 자유를 내고 땅의 교화로 평등을 배워내며
사람마다 서로 어울려 삼합으로 인내천(人乃天) 동학이다.

조상님들이 하늘을 열고 땅을 경영하기 시작한 배달겨레는
우주관 세계관에 의하여 평등·평화·자유로 세상 열었다.
대대로 이어온 수많은 인종이 지구촌 처처에서 고대국가
형성하고 홍익 재세이화 세상 열망하던 정신 되새겨 보자.

기록에 의한 역사시대에서 공간적 분석과 시간적 분석으로
공차·시차 공감되는 가치관 정립과 넓은 안목이 요구된다.
얻어들은 짧은 지식으로 어설픈 논리에 편승하여 호들갑을
떨지 말고 진지한 사고력으로 동학 세계관 이해해야 한다.

수운 최제우 경천사상 기반으로 유(儒)·불(佛)·선(仙)과
도참, 후천개벽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만드니 ‘동학’이다.
제폭구민 보국안민 세상 열고자 했던 성현·영웅·장군들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바른 세상을 보는 큰 안목 가져야 한다.

/백승기 박사

 전북도민일보와 신지식장학회 공동기획취재팀이 실시하는 ‘걸어서 역사속으로 시즌 4’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걸어서 동학속으로’로 동학군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기로 했다. 탐방은 3월 1일 정읍시청에서 발대식으로 장정에 올랐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가 한겨울을 방불케하지만 시청 현관에 ‘걸어서 동학속으로 탐방단 방문을 환영한다’는 자막이 반긴다.

 이 자리에서 송금현 정읍시 부시장을 비롯 박양수 정읍시 동학문화재과장 등 시청 관계자들과 탐방단인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박창보 국학박사,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등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펼치는 역사탐방 의미와 방향 그리고 여정 등에 대해 논의했다.

전봉준 생가터 기념촬영
전봉준 장군 고택 기념촬영

 ▲동학과 서학<박창보 국학박사> 서학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수운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한 동학은 반봉건사회와 반외세 사상을 주장한 한민족 최초의 신종교이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무과를 준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전국을 유랑하며 장사로 생계를 꾸렸지만 신통치 않았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과 질곡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서구 문명의 유입과 천주교의 포교로 인한 위기의식을 제세구민의 명분으로 삼게 되었다. 마침 우연히 을묘천서라는 비서를 입수하여 수도에 정진하였으며 상제라는 신선을 대면하는 신비체험을 하였다. 느닷없이 몸이 떨리고 마음이 선뜩해지며 어떤 말씀이 공중에서 들려왔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의술과 복술 등의 잡술에도 관심이 많았고 수련을 통해 일종의 접신이나 종교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도를 깨달아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유불도를 조합한 시천주 사상을 내세워 포교를 하며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서구와 일본의 침탈을 배격하였다. 시천주란 천주 또는 한울님이 사람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똑같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는 의미이다. 교세가 확산되자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주제를 도입하였다.

해월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삼아 동학에 대한 일체 사무를 관장토록 하였으며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최제우가 체포되어 효수되자 최시형이 동학을 계승하여 농민들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시키고 조직화하였다.

빈농 출신으로 머슴을 살다 동학에 입교하여 2인자가 되었으니 신심과 능력이 출중하였을 것이다. 피신을 하면서도 교세 확장에 힘쓰고 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발간하였으며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였다. 최시형에 의해 시천주는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라는 사인여천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데다 각종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894년 초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고부접주 전봉준이 봉기하니 이를 고부농민봉기라 한다. 조병갑이 도망가고 처벌을 받은 후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씌우고 악행을 저지르자 봄에 창의를 하였는데 최시형은 시기에 대한 반대의견을 보였다. 한때 이하응의 식객이었던 전봉준의 이력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였지만 청일전쟁 이후 가을에 다시 봉기할 때 총궐기할 것을 명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맞아 우금치에서 싸워 참패하고 총대장 격인 전봉준은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봄에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시형은 피신을 거듭하며 1897년 12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4월 원주에서 송경인의 밀고로 체포되어 7월 한양에서 처형되었다.

제3대 교주 손병희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교리화한 후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하여 새롭게 발전시켰다. 인내천은 평등과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손병희는 북접대도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여 항쟁을 하다 패배후 피신하였다. 미국행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에서 머무르며 망명개화파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끌어들여 도전, 재전, 언전이라는 삼전론을 내세워 교세의 재건에 힘썼다. 귀국 후 진보회와 일진회에 관여했던 배교자 이용구, 송병준 등을 출교시키는 한편 교육 분야에 힘을 쏟았다. 1919년 천도교측의 대표로서 3·1운동의 주도적인 역할로 참가하였다. 자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22년 별세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대시기에 농민층으로부터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자주적으로 외침을 물리치려 했다는 점과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당시의 정권과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으나 백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이후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됨으로서 조선의 다양한 분야에서 변혁의 영향을 미쳤다. 만일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하였더라면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비극과 나라를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은적암 터
은적암 터

▲수운(水雲) 최제우와 교룡산성 은적암<김주원 뱅기노자 대표·교사>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경주최씨로 시조 최치원의 25세손이자 사성공파 14세손으로 알려졌다. 호는 수운으로 유학자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문과 응시가 불가했으나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인 부친 최옥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공부를 시켰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몰락한 양반으로 10여 년간 장사꾼으로 전국 각지를 유랑하게 되면서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하게 된다. 때마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이 조선을 침략할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올바른 정신세계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요순지치(堯舜之治)도 공맹지덕(孔孟之德)도 부족언(不足焉)”이라며 새로운 가르침과 문화가 필요한 시대가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장사를 정리하고 31세(1854년)에 천도를 얻으려 수행을 시작하여 37세(1860년)에 커다란 깨달음을 <동경대전>에 기록하며 이즈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어리석은 이를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 ‘제우(濟愚)’로 바꾸게 된다. 최제우는 제자 최중희를 대동하고 1861년 12월부터 1862년 7월까지 남원에 머물게 되면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동학을 포교했으며 동학의 기본을 이루는 경전들을 대부분 남원 교룡산성에 있는 선국사 은적암에서 집필했다. 최제우의 사상이 훗날 원불교와 증산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남원으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겠다.

교룡산성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 기적비(紀績碑)
교룡산성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 기적비(紀績碑)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었고, 지형을 이용하여 돌을 쌓아 둘레는 3.1km정도 되며, 크지 않은 동문 홍예문을 보면 방어용 산성으로의 역할이 매우 돋보인다. 산성의 본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선국사를 지나 한참을 더 오르니 은적암 터 표지가 있는데 지리산 바래봉과 만복대가 있는 서북릉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산 뷰가 숨겨진 곳이다. 최제우가 동학의 경전을 집필하였으며 후에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로 사용하였고, 또한 독립운동가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이기도 하다.

2011년 부산 영화제 상영작 중 하나인 서사 독립영화, ‘동학, 수운 최제우’를 아시나요! 감독 박영철이 지천명을 지나 이순으로 향해가는 나이에 어렵게 완성한 영화다. 그는 특별히 두 곳에서 상영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첫째 도쿄 극장에서 일본인들이 꼭 알아야 할 사상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인도인데 탄압받은 역사를 간직한 인도인에게 동질성을 느꼈고 동시에 ‘동방의 등불’에서 코리아를 예찬한 타고르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뜻은 이루어졌을까? 교조 최제우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닮았다며 영화 제작에 써달라고 수백만 원을 건넨 기독교 장로의 말이 생각난다.

교룡산성 기념촬영
교룡산성 기념촬영

▲인내천은 전국 방방곡곡 희망의 미륵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말 못 하는 어린이가 울면 어머니는 얼른 알아듣고 달래는 도력을 발휘한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은 탐관오리 아전들의 핍박에 시달린 민초들의 고통을 알아듣고 어루만진 수은 최제우! 동학은 미완의 혁명이요, 민족정신으로 승화되어 오늘 우리의 불타오르는 가슴에 있다.

새 시대, 새 물결을 그토록 갈망했던 조선이여 동학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하늘과 사람이 하나인 사람존중. 생명 중심 인내천은 전국 방방곡곡 희망의 미륵으로 남으리라.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강효 기자(제2사회부/정읍)

▲자문위원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 슈퍼바이저

△박창보 국학박사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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