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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동학속으로] (10) 삼례봉기
[걸어서 동학속으로] (10) 삼례봉기
  • 이방희 기자
  • 승인 2024.08.19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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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봉기 삼례! 농민혁명군 녹두꽃 전사들 모였다

  ‘척양척왜’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신단수 아래 신시를 내고
 국민 주권의 민주정신 계승하며 반만년 역사를 경영해 왔다
 국가 3대 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은 천지인(天地人)삼합되고
 교조 수운(水雲)사인여천 한울정신 승화되어 K-문화 이뤘다

 시작도 끝도 없는(無始無終) 본심본태양 천부경 민족경전은
 고운 최치원 묘향산에 세상 빛 비문 되라 전통을 이었으나
 얼간이 조정 대신들은 민족 불씨 끄러 온 자들과 내통하니
 무능 고종은 구중궁궐 감금되고 민족자존 앉은뱅이 되었다
 

 부패한 조선 아전들과 고부 조병갑의 갑질 폭정 탐관오리들
 원 부마국에서 독립한 조선의 씨줄 날줄 목숨줄마저 끊었다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개남 동학 파랑새 녹두장군
 분개하며 삼례 재집결하니 척양척왜 2차 봉기 시민혁명이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자치정부 52 집강소는 삼일천하 꿈으로
 조정은 동학군 진압으로 왜와 결탁 국민 자치정부 마감한다
 농민 천민 하나 되어 우국충정 보국안민 죽창들어 봉기하나
 무기열세 파랑새 녹두꽃 경군,왜놈에게 애꿎은 목숨 바치네
 

 을사오적 나라 팔아 왜적에 충성맹세 대대손손 영화이었고
 130년 수초에 갇힌 30만 동학 영혼 억울하여 잠 못 이루네
 전군가도 신작로 수탈역사 삼례 김제 만경벌판 휘돌아보니
 산천은 유구하나 인걸은 간데없고 공원의 잡풀만 무성하네

  /백승기 박사 

 

동학농민혁명봉기비

 ▲삼례봉기의 원인이 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전투와 황룡촌전투에서 승리하고 1894년 4월 27일(양 5/31) 전주성을 점령했다. 놀란 조선정부는 청군을 요청했고 5월 6일(양 6/9)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상륙했다. 외세의 개입을 염려한 농민군은 경군과 6월 6일(양 7/8)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청·일 양군의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일본군은 거부하고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용산에 주둔, 일부는 한양 시내까지 진군했다.

  6월 21일(양 7/23) 새벽, 일본군 중 7,000명은 한양도성의 외곽 주요지점을 장악하고 1,000명의 병력이 경복궁의 서쪽 영추문과 동쪽 건춘문을 동시에 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압을 위해 경복궁 경비병력 상당수가 빠져나간 조선군은 일본군을 방어하기엔 역부족이었으나 결사 항전했다. 일본군은 영추문을 넘어 일부 조선군을 제압하고 왕의 침소에 침입하여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 사태의 종료를 위해 조선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칼을 빼어 위협하였으나 고종은 듣지 않았다. 결국 가짜 칙령으로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들을 압수했다.

 이에 분개한 동학 농민군들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군왕을 능멸한 일본군을 추출하고자 보국안민 척왜양을 기치로 제2차 농민전쟁의 서막 삼례봉기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표지석

 ▲교조 신원 운동과 삼례 역할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1864년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자 동학 교도들은 교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동학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매해 올린다. 교조 최제우의 죽음 이후 동학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 파벌이 형성되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교리와 조직을 정비한다. 1891년부터 지속적인 관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동학도들은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차원의 시위에 그치지 않고 탐관오리의 횡포를 질타하고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제시함으로써 민중에게 미래의 희망을 각인시키는 노력을 해 나간다.

  최시형이 1892년 11월 1일에 삼례 집회에 동학 교도의 참석을 독려하자 수천 명이 참석하게 된다. 삼례 집회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전라도와 중앙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인 역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894년 9월,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가시화하자 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는 9월 삼례에 총집결하여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군을 조직하면서 제2차 동학 농민 봉기의 출발지가 되는 커다란 역사를 안게 된다.

  완주군 삼례는 1892년 11월 동학 교조신원을 위한 집회 장소였고, 1894년 5월 정부군이 진지가 되었으며 1894년 9월 2차 동학 농민 봉기의 출발지로, 반봉건 반외세적 저항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동학농민군 출진상-10만여 동학농민의병이 애국단심 구국의 일념으로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한 것을 표현.
동학농민군 출진상-10만여 동학농민의병이 애국단심 구국의 일념으로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한 것을 표현.

▲삼례봉기로 본 동학의 변화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10월 12일(음력 9월 14일) 삼례에서 두령회의를 열고 대도소를 전주의 선화당에서 삼례로 옮기며 2차 봉기를 준비한다.

전봉준·김개남 등의 호남의 남접은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북접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하며 일본군의 조선침략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다.

당시 조선은 7월 29일(음력 6월 27일)성환에서 청,일 교전 이후 9월 29일(음력 8월 17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면서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고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동학교도를 토벌하였으니 그 무자비한 잔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봉준의 삼례봉기로 전라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와 황해도까지 영향을 미쳐 당시 동학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보국안만’, ‘척왜양이’의 대의로 동학의 모든 교인들을 하나로 뭉칠 명문으로 작용한다.

결국 익산 접주 오지영과 금구 김방서, 함열 유한필이 설득하고 손병희도 힘을 보태 설득하자 최시형은 무장 봉기를 결정한다. 동학 교주 최시형의 봉기 선언은 강력한 힘과 동기가 되어 전국에서 동학군이 동참하게된다.

음력 9월 22일 상주 점령을 신호탄으로 24일 진천에서, 25일 안동에서, 26일 음성에서, 27일 문경에서, 29일 경기 안성과 이천에서 봉기하고 30일엔 청주성을 습격한다.

고부민란과 무장봉기가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조선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이었다면 삼례봉기는 일본이라는 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을 상대로한 국제전쟁이었으며 나라를 수호하는 항전이었다.

하지만, 조선조정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선택을 하고 결국 일본의 침략으로 폐망의 길을 걷게된다.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조성됭 대동의 장 힘 하나되어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조성된 대동의 장 힘 하나되어

▲삼례봉기기념비와 삼례봉기역사광장의 조형물 <고혜선, 안중근 장군 전주기념관 관장>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걸고 일어선 수만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이 남아 있는 곳. 이곳 삼례는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의 숭고한 역사 현장이다. 삼례에는, 그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삼례봉기기념비로, 삼례터미널사거리 동남쪽 찰방다리 옆에 있다. 다른 하나는, 신금리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다. 삼례봉기기념비는 1996년, 삼례봉기역사광장은 2002년에 조성되었다.

  삼례봉기역사광장 입구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역사광장 표지석, 진입로 다섯 개의 직사각형 말뚝 4면에 삼례봉기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직경 30m의 원형 광장에 들어서면 돌무더기에서 솟은 굵은 팔과 그 손에 붙들려 있는 쇠스랑이 눈에 뜨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대동의 장이다. 그 옆 돔 형태의 조형물은 이름 없이 산화한 수많은 정령이 서로 어깨를 붙들고 하나가 된 추념의 장이다. 이 조형물들은 2001년 11월 삼례봉기역사광장조성사업 현상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이다. 그리고 역사 광장 동쪽 대숲 안에 4미터 높이의 동학농민혁명삼례봉기비가 있다.

  그러나 삼례에 와서 동학의 역사를 찾아보고자 하는 이들도, 삼례봉기기념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역사광장 역시 삼례 중심지와는 거리가 있어서 한쪽에 밀려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삼례의 이 숭고한 역사를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대숲 속 4미터 높이 동학농민혁명삼례봉기비를 삼례로와 동학로가 갈라지는 지점에 옮겨 세우고, 동학농민군 제2차 봉기를 기념하는 축제가 생기기를 소망해 본다.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조성됭 추념의 장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조성됭 추념의 장

 ▲2차 동학농민군의 집결지 삼례 <김길태 솔라리움 대표>  조선시대 회안대군 이방간을 향해 세번 례(禮)를 올렸다는 유래를 가진 천년 교통의 요충지 삼례에 탐방을 왔다.

 삼례는 1892년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 집회와 1894년 외세를 몰아내기 위하여 2차 동학농민군의 집결지로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항일의병 전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곳 삼례 집결지에서 130년전 동학농민군 애국, 애민의 의기에 절을 한 번 올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불굴의 용기에 두 번째 절을 올리고 수만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며 마지막 세번째 절을 올린다.

 

농민군 4대 명의

▲ 삼례 봉기는 민족자존 회복이다.<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조선은 격동하는 국제 질서의 무지와 쇄국으로 일관한 채 내부 분탕과 매관매직으로 국론 분열만 치달았다.

 500년 종묘사직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 준비를 했다.

 관직 팔아 정권 유지하는 관료들은 부패 아전과 결탁하여 세 불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백성들의 삶은 무너졌다.

 만석보 만들어 백성을 괴롭힌 국가대표 갑질 선수 고부 군수 조병갑 제 곳간 채우더니 대대손손 반성도 없다.

 친일 후손 정부 요직 맡으며 역사 주인공으로 허세 부린다.

 이제는 광복이다 건국이다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자기 진영 목소리 키우며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다.

 국론과 이념은 다시 분열되어 가고 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된다. 힘이 약한 가장은 가족을 잃는다.분열된 정치는 국민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대한민국 어디로 갈 것인가?

 위정자들은 부디 삼례로부터 교훈을 본받기 바란다.

 

삼례봉기기념비 - 대숲 속에 방치되어 있다.
삼례봉기기념비 - 대숲 속에 방치되어 있다.

 ▲지구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기적은 내가 태어남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서 있다는 것이다.

 지구는 대기층이 감싸고 있어 동식물도 인간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기(地氣)와 천기(天氣) 그리고 우주의 파장이 어울리는 생기(生氣)가

 기류 층을 형성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절명시 중 일부다.

 생야일편 부운기 生也一片 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사야일편 부운멸 死也一片 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다.)

 모이고 흩어짐이 인생이라는 표현을 구름에 비유한 명문이다.

 지구는 둥글기에 각자 내가 서 있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다.

 중심을 잘 잡고 살아야 한다.

 바람에 구름 흩어지듯 언제 어디서 넘어질지 모른다.

 대한은 단군의 개천(開天)으로 시작한 홍익인간 세상이다.

 유구한 세월 우리는 효(孝)를 중심으로 민족혼을 지켜 왔다.

 충의(忠義) 중심에도 효가 있었다.

 유학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근간에도 효가 중심에 있다.

 근본을 새기며 지구 중심에 중심을 잘 잡고 서보자.

 

 ▲애들아! 싸우지 말고 놀아라<김설희 (주)그라투스 이사>  애들아! 싸우지 말고 놀아라.

 인간의 적은 인간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다.(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알아야 한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이 성당에서 은 촛대를 훔치고 나오다가

 신부님으로부터 깨달음으로 뉘우치며 허공에 외쳐댄 대사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나인가?

 수운 최제우 선생은 깊은 성찰과 오랜 유랑을 통해서 큰 깨달음으로 득도하셨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음이 천지인 합일이요.

 하나는 한과 나이기에 하나로 존재한다.

 베 짜는 며느리와 책 읽는 아동이 한 울안에 있는 큰 님이시기에 한울님이라 하였다.

 우리는 무지할 때 그리고 분열될 때 스스로 무너지고 당했다.

 무능한 가장과 부패한 지도자는 나를 모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기획취재팀>

▲취재기자단

△이방희 제2사회부장(부국장/팀장)

△배종갑 제2사회부(부장/완주)

자문위원
자문위원

▲자문위원

△백승기 도시공학박사, ‘무릉도원 상상캠프’슈퍼바이저

△김주원 (주)뱅기노자 대표, 교사

△고혜선 안중근장군 전주기념관장

△김길태 솔라리움 대표

△고개희 전사들 사무총장, 교보생명 신논현지점장

△신동만 한국나그네연맹 회장

△윤재민 (주)RNS 대표, 신지식장학회 청년국장

△김세용 전사들 산악대장

△김설희 (주)그라투스 이사

△이주원 디자인 원 대표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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